
🐙문어
유쾌하다. 사회의 이면을 거침없고 명쾌하게 찔러내는 필력이 돋보인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내가 사랑하는 생물 중 하나인 '문어' - 이 영리한 두족류의 매력이 맛깔나는 해물탕 재료 그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

🦀대게
문어편보다는 해양생물의 존재감이 훨씬 커서 만족스러웠다. 투쟁하는 러시아 대게라니... 매력적이지 아니한가? 해물탕 재료에서 투쟁하는 동지로, 해양생물의 존재감이 새롭게 새겨지는 순간이 신선하다.

🦈상어
많고 사소한 깨달음이 스쳐 지나간다. 천대 받는 돌봄노동에 대하여, 자유를 빼앗긴 동물들에 대하여, 언제나 사회적 약자들을 노리는 사기꾼들과, 사랑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관하여... 동물을 좋아한다는 말에, 동물원에 가자고 말하는 사람과는 영원히 통할 수 없을 거라는 누군가의 말이 문뜩 떠오르는 단편이다.

🐟개복치
냄새 나고 끈끈한 체액으로 뒤덮인 물고기의 본질을 파악하는 어린 아이의 순수한 두 눈에서, 수조에 갇힌 생명체들을 보고 서럽게 울던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만나서 너무나 반가운, 9족 러시아 혁명 대게, 예브게니.

🪼해파리
나이가 들어서 변함없이 투쟁하는 부부의 모습도, 기가 막히게 나타나서 그런 부부를 데려가는 검은 정장들도 이제는 반갑다. 사람은 변하기 때문에 주인공은 이제 비인간 생물체의 꿈을 꾸고, 검은 정장들에게 엄포를 놓기도 하고, 위원장을 오빠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인간은 죽어도 변하지 않아서 암이 생겨도 투쟁하고, 해산물만 보면 입맛을 다시고, 푸릉푸릉 소리를 내며 잔다. 인간은 이토록 쉽게 변하다가도, 또 한결같고...

🐋고래
고래를 아낌없이 주는 동물이라고 표현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고래가 포식자들로부터 소동물을 보호하고, 인간의 미식과 향을 위해 사냥 당하고, 죽어서까지 바다 환경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고래가 아낌없이 주는 동안, 인간은 바다에, 자연에, 더 나아가 지구에 무엇을 하였을까? 기술 발전으로 인해 인류는 과연 진보한 것일까? 아니면 인간 소외에 대한 고려 없이 자연을 마구 파괴해가며 인간종을 자연의 싸이클에서 소외시키고, 서식지를 스스로 훼손하며 퇴보한 것일까? 자연과 환경에 대한 보호 없이 이루어지는 개발을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검은정장의 정체는 이 소설이 사실 작가님의 자전적 소설이었다는 사실만큼 놀랍고, 반가웠다. 내가 세제를 적게 쓰고, 열심히 재활용하고, 일회용품 사용을 줄여도 일본이 오염수를 바다에 붓고, 기업들은 산을 깎아 골프장을 만들고,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에 미사일을 날리는 국가 권력자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바다를 과연 지킬 수 있을지, 무력감과 회의감이 드는 21세기 지구. <지구 생명체는 항복하라>를 통해 공감과 위로를 받는다. 누가 뭐래도 난 동물이 좋은만큼 동물원은 싫고, 사회생활 하려면 필수라 그래도 골프장이 역겹고, 울적할 때마다 이런 SF 소설 읽고, 돈 생기면 멸종위기종 보호에 기부나 하면서 그렇게 살고싶다.
고래슈트외계인 아저씨, 지구로 돌아오지 마세요.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투쟁



저주토끼를 먼저 읽었으나, 저주토끼의 독후감을 뒤에 쓰는 이유는, 이 책의 후기가 그다지 좋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작가의 메시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던 전작과는 다르게 <저주토끼>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단편이 절반이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복수는 허망하다?
저주는 언젠가 되돌아온다?
칼 맞을 일 없게 잘 살자?
인간은 탐욕스러운 존재다?
메시지가 직관적인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다 읽고 나서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라는 감상이 드는 소설은은 불호다ㅠ
게다가 난 복수극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복수극의 통쾌함과 카타르시스를 좋아하는 거지, 복수를 해놓고도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 복수는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다 - 라는 교훈을 주는 작품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복수를 못해서 홧병으로 정신병 걸리느니 복수를 하는 게 낫지 않나?
가만히 있으면 원수의 시체가 물에 떠내려 온다는데, 그것도 결국 누군가가 결단을 내리고 처단을 했기에 시체가 된 것 아니겠는가?
특히 복수가 아니라 용서가 답이라는 식의 해결책을 강제로 주입하려는 작품들을 보면 위선자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느껴진다...
이 소설은 용서가 무조건 답이라는 식의 일차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통쾌하고 속시원한 복수극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공포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공포는 사실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갖가지 이유로 불행해지는 사람들을 모아놓은 것에 더 가깝다.
특히 몇몇 소설들은 복수를 했음에도 결말이 너무 허망하고 씁쓸해서, 읽고 난 후 뒷맛이 너무 안 좋았고, 또다른 일부 소설들은 지나치게 난해해서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건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내가 작가의 메시지를 한 번에 캐치할 내공이 아직 안 쌓여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데미안처럼 여러번 읽으며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지도 않았다.
또한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의 역할이 가부장적인 틀 안에만 갇혀 있는 것도 지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어떤 서사를 가지건 결국 결혼해서 애 낳고 좋은 엄마가 되는 것에 사명을 느끼는 캐릭터가 80% 였던 느낌?
'저주토끼' 속 엄마도, '몸하다'의 주인공도, '덫'에 나오는 딸도, '즐거운 나의 집' 속 엄마도,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의 공주조차도 '엄마'와 '모성애'라는 전형적인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굉장히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여우의 원혼이 씌인 딸이 온갖 고난과 학대를 버티다가, 결국 근친상간으로 임신한 자식을 지키기 위해 개비에게 대드는 장면이나, 심지어는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 사막의 저주를 풀어낸 공주조차 평범한 엄마가 되어 살아가고 싶다고 하는 결말에서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일부 작품에서 가부장제를 비판하려는 시도가 읽히긴 했으나, 평면적이고 무기력한 여성 캐릭터들이 그러한 시도를 상쇄시킨 느낌?
게다가 남편이 됐건, 개비가 됐건, 썸남(ㅋ)이 됐건, 남자들한테 착취 당하거나 배신 당하는 여자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막판에는 조금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현실에서도 뉴스만 틀면 고통받는 여자들이 나오는데 소설에서까지 이렇게 보고싶진 않았어ㅠ
물론 10개의 단편이 모두 별로였던 건 아니다. 꽤나 마음에 드는 단편도 세 개 있었는데, 바로 '저주토끼' '안녕, 내 사랑' 그리고 '재회'다.
저주토끼는 이 책의 마스코트 같은 단편이라 그런지 토끼가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는 참신한 설정도 좋았고, 수미상관으로 끝나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다. 오디오북으로도 다시 한 번 들었는데, 성우님의 낭독에서 소설로 읽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약간의 음산함이 느껴져 새로웠다.
'안녕, 내 사랑'은 오디오북이 정말 압권이었다. 이주승 성우였는지 임혁 성우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로봇과 사랑에 빠진 주인공에게 저절로 이입이 되는 느낌? 마지막 로봇들이 함께 입 모아 '안녕, 내 사랑'을 외칠 때의 소름과 임팩트란...

망한 사랑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이 경우에 이게 과연 사?랑? 인가 싶긴 하지만...ㅋㅋㅋ

'재회'의 경우, 한 번에 소설의 의미를 온전히 캐치하기에는 어려웠지만 유일하게 여러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 단편이었다.

결말 부분에 예상치 못했던 반전이 나오는 점도 좋았다. 뒷맛이 씁쓸한 소설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 소설은 작가님의 필력이 좋아서인지 괜찮은 여운으로 남았던 것 같다.
다 쓰고 나서보니, 두 책에 대한 감상이 갈린 이유가 장르에 대한 호불호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워낙에 sf장르를 좋아하는지라...ㅋㅋ <저주토끼>에서 마음에 들었던 세 단편 중 하나인 '안녕 내 사랑'도 sf로 분류되는 소설이었고...ㅋㅋ
하 취향 너무 투명하네... 어쨌건 친구에게 정보라 작가님의 책 한 권을 추천할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를 추천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해당 책으로 교환독서도 해보고 싶은데 같이 해줄 친구 어디 없으려나^-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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